아름다운 금수강산

강화 삼랑성(정족산성)과 전등사

마음자리와 저녁노을 2023. 12. 17. 23:53

강화 삼랑성(정족산성)  

  강화(江華)하면 떠오르는 이미지 중 하나로 마니산 참성단을 꼽을 수있다. 참성단은 전국체전 때 성화를 채화하는장소로 더 잘 알려져 있는 민족의 성지이다. 삼랑성(三郞城)은 마니산 에서 서쪽으로 약 6㎞ 떨어져 있으며, 축성 연대는 정확하지 않으나, 고려가 1259년 삼랑성 안에 궁궐을 만들었다고 하니 그 전에 이미 성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성곽이 축조되어있는 모습을 보면 보은의 삼년산성이나 경주의 명활산성처럼 삼국시대 만들어진 성으로 추측된다.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참조) 삼랑성은 정족산성( (鼎足山城)이라고도 하며 단군이 세 아들에게 성을 쌓게 하고 이름을 삼랑성이라 했다는 기록이 고려사에 남아 있다. 고려 때 보수공사가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영조 15년(1739)에 성을 다시 쌓으면서 남문에 문루를 만들고 ‘종해루’라고 하였다. (1976년에 남문인 종해루 복원) 또 한 조선왕조실록 사고(史庫)가 있었던 곳이다. 기록에 의하면 1660년(현종 1)에 실록을 보관하였던 마니산사고가 정족산성 안으로 옮겨져 ‘정족산사고(鼎足山史庫)’라고 불렸는데, 이 때 왕실 족보를 보관하는 선원보각(璿源寶閣)도 함께 건립되었다. 삼랑성은 강화산성과 더불어 고려-조선시대에 수도 개경과 한양의 외곽을 방어하는 매우 중요한 장소였다. 강화 삼랑성은 유구한 역사를 가진 곳으로, 예로부터 신성한 곳이라는 인식이 있었다.

 

천년고찰 전등사와 정족산사고

  정족산성 내에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 된 전등사가 자리잡고 있다. 傳燈寺는 고구려 소수림왕 11년 (381) 아도화상이 창건한 절로 창건 당시에는 진종사(眞宗寺)라 했다. 우리나라 최초의 불교 전래는 고구려 소수림왕 2년(372)에 전진의 부견이 사신과 승려 순도(順道)를 보내 불상과 불경을 전해 주었다는 기록보다 9년 후이다. 1282년 고려 충렬왕의 妃인 정화궁주가 승려 '인기스님'을 남송(南宋)에 보내 대장경을 가져오게 하고, 이 대장경과 함께 옥등을 이 절에 시주한 후로 '부처님 법의 등(燈)이 전(傳)해진 곳'이라 하여 전등사 (傳燈寺)로 이름이 바뀌었다. '옥등'의 밝음도 부처님의 지혜를 상징하며, '전등'은 부처님의 지혜가 전해진 것을 뜻한다. 1605년(선조38년), 1614년(광해군6년)에 화재로 전각들이 완전히 소실되었으며 다음해 4월부터 재건하여 1621년 2월에 낙성이 되었다. 1707년에는 사각史閣을 고쳐짓고 별관인 취향당을 지었으며 이후 여러차례 중수를 거듭하였다.

 

병인양요와 정족산성 전투

  조선시대에 강화도가 한양을 방어하는 외곽 기지로 중시되면서, 고려 가궐(假闕)터에는 정조 때 정족진(鼎足鎭)의 군창(軍倉)인 정족창(鼎足倉)이 설치되었다. 그 뒤 1866년(고종 3) 프랑스 군대가 강화도를 침략하였을 때, 이곳에서 두 나라 군사가 치열한 전투를 벌이기도 하였다. 1866년 병인양요는 흥선대원군의 천주교도 학살과 탄압에 대항하여 프랑스가 극동함대 해군 특전대 약600여 명을 보내 강화도로 침범한 사건이다. 프랑스는 영종진을 거쳐 문수산성(김포 한강어구)을 공격하였다. 문수산성 에서 한성근이 이끄는 조선군과 맞서 사상자 27명을 내는 등 피해를 입지만 끝내 강화도에 상륙한다. 이때 양헌수는 휘하 군사 120명을 이끌고 유일하게 함락되지 않은 정족산성으로 들어가 수성장(守城將)이 되었다. 프랑스군은 병력 60여 명을 보내 성을 함락시키려 공격을 했다. 양헌수는 사거리가 짧은 조총의 단점과 프랑스와의 전력차를 알고, 총을 잘 쏘는 포수와 승려까지 동원하여, 프랑스군이 성에 가까히 접근하면 쏘는 근접사격을 도입했다.

프랑스 병력들은 놀러가는 기분으로 음식을 잔뜩 싣고 방심한 채로 정족산성에 접근하다가 근접사격을 가하자, 프랑스군은 전사자 6명에 부상자 35명의 피해를 입고 후퇴했다. 이후 프랑스의 로즈 제독은 정족산성을 함락하기에는 병력이 모자라다는 이유로 강화도에서 철군하였다. 이 승리로 정족산성을 지켜냄으로써 사고의 조선왕조실록과 전등사도 함께 지킬 수있었다. 조선은 이 전투를 기리기 위해 1873년 정족산성 입구에 승전비를 세웠는데, 훗날 인천시 기념물 제36호로 지정되었다. 동문 안에 자리한 양헌수승전비(梁憲洙勝戰碑)는 이 때의 승리를 기념하여 세운 것이다.

 

전등사의 설화(전등사 홈페이지 참조)

▶  은행나무
  1600년이 넘는 고찰이다 보니 경내에는 아름들이 고목들이 즐비하다. 눈대중으로도 수백 년은 됨직한 나무들이 입구에서 부터 길 양편으로 늘어서 있고 가지는 하늘을 가린다. 느티나무 부터 은행나무, 이름모를 거목들이다. 그중 두 그루의 커다란 은행나무가 있다. 수령이 5백 년이 넘는 나무들은 한 나무는 노승나무, 다른 한 나무는 동승나무로 불리는가 하면 암컷, 수컷으로 불리기도 한다. 은행나무는 암컷과 수컷이 서로 마주보고 있어야 열매를 맺는다.(자웅이주) 그런데 전등사 은행나무는 꽃은 피어도 열매가 맺지 않는다고 한다. 이 신기한 나무들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있다. 강화도령 철종 임금 때의 일이다. 조정에서는 전등사에 은행을 스무 가마나 바치라고 요구한다. 전등사 은행나무는 기껏해야 열 가마밖에 열매를 맺지 않는데 스무 가마를 요구하니 관리들의 횡포가 이만저만 심한 게 아니었다. 이 지시를 듣게 된 동승이 노스님께 고했다.
“스님! 정말 관가에서 너무들 하는 것 아닙니까요?”
“허허, 참으로 난감한 일이다. 얘야, 그렇다고 그 사람들을 미워해선 안 되느니라. 참아야 하느니…….”
노스님은 이렇게 타일렀지만 자신도 깊은 고민에 빠졌다. 은행 스무 가마를 내놓을 수도 없었고 관리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으면 더욱 더 불교를 탄압할 것이 분명했다. 노스님은 하는 수 없이 백련사에 있는 추송 스님에게 도움을 청하기로 했다. 추송 스님은 도력이 높기로 소문이 난 분이었다. 며칠 후 추송 스님이 전등사에 나타났다.
곧 전등사 일대에 ‘전등사 은행나무에서 은행이 두 배나 더 열리게 하는 기도가 있을 것’이라는 소문이 퍼졌다. 사람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어 추송 스님의 3일 기도를 지켜보았다. 그 중에는 관리들도 섞여있었다.
“어떻게 은행이 두 배나 많이 열린단 말인가?”
“맞아! 추송 스님이 제 아무리 정성을 드려도 소용없는 짓이겠지.”
사람들은 저마다 이렇게 수군거렸다. 이윽고 기도가 끝나는 날이었다. 갑자기 추송 스님의 기도를 지켜보던 관리들의 눈이 얻어맞은 것처럼 퉁퉁 부어버렸다.
“이제 두 그루의 나무에서는 더 이상 은행이 열리지 않을 것이오.”
추송 스님이 기도를 끝내고 사람들에게 말했다. 사람들은 저마다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바로 그때 때 아닌 먹구름이 전등사를 뒤덮더니 비가 무섭게 내렸다. 사람들은 두려움에 떨며 일제히 땅에 엎드렸다. 얼마 후 사람들이 고개를 들었을 땐 추송 스님은 물론 노스님과 동자승까지 모두 사라졌다. 사람들은 보살이 전등사를 구하기 위해 세 명의 스님으로 변해 왔다고 믿게 되었다. 그 때부터 전등사 은행나무는 열매를 맺지 않았다.

나부상

전등사의 대표적인 건물인 대웅보전은 그 자체만으로도 조선 중기의 건축 양식을 보여주는 귀중한 문화유산이다. 전등사 대웅보전이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된 것은 대웅보전의 지붕을 떠받치고 있는 나부상(裸婦像) 때문이다.
이 나부상과 관련해서는 유명한 전설이 내려오고 있다. 전등사는 여러 차례 화재를 겪었고, 때문에 대웅보전도 여러 차례 중건되었다. 지금의 나부상이 만들어진 것은 17세기 말로 유추된다. 당시 나라에서 손꼽히는 도편수가 대웅보전 건축을 지휘했다고 한다. 고향에서 멀리 떠나온 그는 공사 도중 사하촌의 한 주막을 드나들며 그곳 주모와 눈이 맞았다. 사랑에 눈이 먼 도편수는 돈이 생길 때마다 주모에게 모조리 건네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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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편수는 주모와 함께 살게 될 날을 손꼽아 기다리며 대웅보전 불사를 마무리하고 있었다. 하지만 공사 막바지에 이른 어느 날 그 주막으로 찾아가보니 여인은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야반도주를 했던 것이다. 도편수는 화가 치밀고, 배신감과 분노 때문에 일손이 잡히지 않았지만 마음을 다잡고 대웅전 공사를 마무리했다. 공사가 끝나갈 무렵 대웅전의 처마 네 군데에는 벌거벗은 여인이 지붕을 떠받치는 조각이 만들어져 있었다.
이것이 전등사 대웅보전에 얽힌 나부상의 전설이다. 나부상들은 제각각 다른 모습을 하고 있다. 옷을 걸친 것, 왼손이나 오른손으로만 처마를 떠받든 조각도 있으며 두 손 모두 올린 것도 있다.
만약 나부상 전설이 사실이라면 도편수는 왜 나부상을 조성했으며, 스님들은 왜 처마 밑에 나부상을 조성하는 것을 용인했을까? 단순히 사랑하는 남자를 버리고 떠난 욕심에 눈 먼 여인을 단죄하고자 하는 의미만은 아닐 것이다. 도망간 여인이 잘못을 참회하고 세상을 올바르게 살아가라는 염원도 들어있는 것이다.
또한 나부상들을 보게 될 후대의 사람들에게 부처님의 자비로운 마음을 본받으라는 뜻도 담겨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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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전등사 홈페이지 정리

 

전등사의 문화재

대웅보전 보물 제178호 대조루 인천문화재자료 제7호
약사전 보물 제179호 양헌수 승전비 인천기념물 제36호
범종 보물 제393호 약사전 현왕탱 인천유형문화재 제43호
목조석기여래삼불좌상 보물 제1785호 약사전 후불탱 인천유형문화재 제44호
목조지장보살삼존상 및 시왕상 일괄 보물 제1786호 청동수조 인천유형문화재 제46호
묘법연화경(법화경)목판 보물 제1908호 대웅보전 수미단 인천유형문화재 제48호
정족산사고지 인천시 기념물 제67호 업경대 인천유형문화재 제47호
대웅보전 신중도 인천유형문화재 무설전 및 서운갤러리 죽림다원  

*출처 : 전등사 홈페이지 정리

 

대웅보전
나부상1(대웅보전을 바라보며 우측 앞)
나부상2(대웅보전 우측 뒤)
나부상3(대웅보전 좌측 뒤)
나부상4(대웅보전 좌측 앞)
대조루

대조루
무설전
선불장
종해루(삼랑성의 남문)
범종
범종
명부전
전설의 은행나무
전등사의 봄

 

양헌수 승전비(전등사 홈페이지)
정족산사고 (인천시 기념물 제67호)-전등사 홈페이지